5위.평범해서 더 눈부신 우리들의 시간: 마흔의 길목에서 다시 만난 <보이후드>

 





📌 흘러가는 계절을 배웅하며 남긴 세 가지 사유

  • 극적인 사건 없는 평범한 나날들이 모여 한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적이 되는 과정
  •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며 비로소 이해하게 된 부모라는 이름의 서툰 무게감
  • 순간을 억지로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온전히 머무는 삶의 태도

계절이 바뀌는 길목의 밤공기는 늘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흔들어 놓습니다. 얼마 전 서재 구석을 정리하다 우연히 아이의 유치원 시절 사진첩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불과 엊그제만 해도 제 품에 안겨 종알거리던 작은 아이가 어느덧 훌쩍 자라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형언하기 힘든 뭉클함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세월의 속도에 덜컥 겁이 났습니다.

시간이란 대체 어디로 이렇게 소리 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일까, 내가 놓쳐버린 수많은 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서글픔이 밀려왔습니다. 가라앉은 마음을 안고 조용히 거실 불을 끈 채 다시 찾아 튼 영화가 바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였습니다. 12년이라는 실제 세월을 주인공 메이슨과 그의 가족들이 함께 나이 먹어가며 촬영한 이 영화는, 제게 단순한 시네마를 넘어 지나간 내 삶의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는 듯한 깊은 떨림을 안겨주었습니다.

개봉 당시 젊은 날에 보았던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신기하고 잔잔한 성장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을 뿐이었습니다. 자극적인 갈등이나 반전 없이 흘러가는 서사가 조금은 담담하다 못해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나이를 먹고 부모의 자리에 서서 다시 마주한 화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스크린 속에서 소년의 턱선이 굵어지고 부모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지는 그 무심한 시간의 흐름 자체가 가장 웅장하고 눈물겨운 드라마였습니다.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우리를 만든다

영화 속에는 대단한 영화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한 성장물에서 다루는 거창한 첫사랑의 격정이나 비극적인 사고,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거대한 전환점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어린 날, 아버지와 함께 볼링을 치며 나누던 시시콜콜한 대화, 이삿짐을 싸며 투닥거리던 남매의 실랑이처럼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파편들이 묵묵히 이어질 뿐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관객의 가슴을 가장 세게 치고 들어오는 것은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이었습니다. 저 역시 제 지난 세월을 가만히 반추해 보면, 기억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들은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성취했던 순간들이 아니었습니다. 늦은 저녁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반겨주던 가족들의 따뜻한 밥 냄새, 주말 오후 소파에 누워 나누던 실없는 농담,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동네 골목길을 걷던 서늘한 바람의 감촉이었습니다.

"인생은 특별한 하이라이트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조차 희미해진 무수한 평범한 날들이 켜켜이 쌓여 빚어낸 거대한 모자이크다."

우리는 늘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 갈망하며 살아갑니다. 더 큰 성공, 더 완벽한 조건, 더 찬란한 내일을 꿈꾸느라 정작 지금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평온한 현재를 소홀히 대하곤 합니다. 메이슨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삶의 본질은 거창한 미래가 아니라 이미 지나쳐온 그 무수한 '평범한 오후'들 속에 숨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어 비로소 보인 어머니의 눈물

이번 관람에서 제 마음을 가장 시리게 울렸던 인물은 메이슨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 올리비아였습니다. 홀로 두 아이를 건사하기 위해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며 발버둥 치던 그녀의 모습은, 세상을 살아내며 휘청거리던 우리 부모님들의 등 뒤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선택했던 재혼들이 상처로 끝날 때마다, 그녀가 속으로 삼켜야 했을 자괴감과 외로움의 깊이를 이제는 온전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냥… 뭔가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마침내 장성한 아들 메이슨이 대학 기숙사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던 날, 텅 빈 식탁에 앉아 올리비아가 터뜨리던 절규는 제 가슴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날인 줄 알았는데… 그냥 뭔가가 더 있을 줄 알았어(I just thought there would be more)."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며 인생의 가장 뜨거웠던 젊음을 모조리 쏟아부었는데, 모든 의무를 마친 뒤 남겨진 자신의 삶이 너무나 덧없고 허전하게 느껴졌던 한 인간의 솔직한 비명이었습니다. 부모라는 존재 역시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어른이었던 것이 아니라, 매일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아이와 함께 비틀거리며 자라나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마흔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눈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에게 받았던 서툰 훈계나 부족했던 환경을 원망했던 철없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며 깊은 부끄러움이 차올랐습니다. 그분들도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젊음을 깎아 우리를 키워냈던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올리비아의 굽은 등에서, 언젠가 저 역시 마주하게 될 품 안의 자식을 떠나보내는 서글픈 이별의 계절을 미리 엿보았습니다.

우리가 순간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다

영화의 대미, 대학 캠퍼스에 도착한 메이슨은 새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노을이 물드는 빅벤드 국립공원의 언덕에 올라앉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화를 나누던 중, 친구 니콜이 건네는 말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순간을 붙잡아야 한다(Seize the moment)'고 말하지만, 실상은 반대로 '항상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것 같다(The moment seizes us)'는 역설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든 통제하고 내 뜻대로 계획하며 손아귀에 쥐려 애쓰지만, 시간은 결코 붙잡히지 않습니다. 시간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고, 우리는 그 흐름의 한가운데 서서 매 순간 찾아오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이할 뿐입니다. 흐르는 시간을 억지로 멈추려 발버둥 치기보다는,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이 순간에 온 마음을 다해 머무르는 것만이 세월에 휩쓸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임을 영화는 가만히 일러줍니다.

엔딩 크레딧이 조용히 올라갈 때, 저는 한참 동안 불을 켜지 못하고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12년이라는 물리적 세월을 영화 한 편으로 통과하고 났더니, 가슴속을 짓누르던 지나간 시간에 대한 조급함과 회한이 신기하게도 옅어져 있었습니다. 비록 내 젊음은 지나가고 주름은 늘어가겠지만,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누는 이 평범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빛나는 기적인지 다시금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의 흘러가는 시간 속에는 어떤 순간들이 머물러 있나요?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일상의 한 조각이 문득 그리워 눈시울이 붉어졌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붙잡고 싶었던 시절이나, 세월의 흐름 앞에서 느꼈던 솔직한 마음을 댓글로 편안하게 나누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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